GNES-7 : 게임 서사 전달의 통로
왜 어떤 게임은 스토리가 가슴에 박히고, 어떤 게임은 겉돌까?
들어가며
최근 스텔라 블레이드를 플레이하며 의문이 들었다. 이 게임은 멀리서 보면 꽤 괜찮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뼈대가 되는 세계관이나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흥미롭다. 하지만 막상 패드를 쥐고 플레이해보면 묘한 괴리감이 든다. 게임 플레이나 전투는 정말 재밌지만, 주인공 이브의 목적은 내 목적처럼 와닿지 않았고, 서브 퀘스트는 지루했으며, 슬퍼야 할 장면에서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주제가 훌륭한데도 왜 스토리가 겉도는 걸까.
게임 비평의 언어는 대체로 서사의 깊이를 다룬다. 스토리가 좋다느니, 캐릭터가 매력적이라느니, 세계관이 풍부하다느니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소설과 영화의 언어다. 게임은 소설이 아니다. 아무리 잘 쓴 이야기라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플레이어에게 가닿지 않는다.
이 글은 거창한 이론을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어떤 게임은 스토리가 확 와닿고 어떤 게임은 겉도는데, 그 차이를 설명할 언어가 늘 부족했다. '이 게임은 어떤 방식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름대로 답해보고 싶었던 메모에 가깝다. 전달 방식을 일곱 가지로 나누고 편의상 GNES-7(Game Narrative Experience System 7)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GNES-7 — 일곱 가지 전달 방식
미리 짚어둘 점이 있다. 이 일곱 가지는 모두 같은 층위에 있는 요소가 아니다. 어떤 것은 연출 방식이고, 어떤 것은 시스템의 작동 원리이며, 어떤 것은 플레이어 자체를 끌어들이는 메타적 사건이다. 젓가락과 굴착기를 같은 줄에 놓으면 이상해 보이지만, 무언가를 집어 올리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일곱 가지 역시 '스토리가 어떤 요소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전달되는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묶었다.1. Cinematic (선형적 시네마틱형)
압도적인 연출과 컷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내세워 플레이어의 감정을 직접 이끈다. 플레이어는 관객이 되고, 영상을 보는 행위를 통해 이야기가 전달된다. 다만 컷신이 너무 잦거나 실제 플레이와 컷신의 분위기가 어긋나면 심각한 몰입 붕괴가 일어난다.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갓 오브 워가 대표적이다.2. Agency (선택 및 분기 결정형)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그 결과가 즉각적인 피드백과 장기적인 파장으로 게임 세계에 뚜렷하게 나타나 책임감을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말이 몇 개로 나뉘는지가 아니라 유저가 느끼는 몰입감이다. 선택이 주는 도덕적 무게감은 결말뿐만 아니라 과정 내내 작동해야 한다. 과정은 텅 비어 있는데 결말만 갈린다면 그것은 선택하는 시늉에 불과하다. 위쳐 3,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 이 유형에 속한다.3. Reversal (반전 및 트릭 주도형)
게임 속 세계에 의도적으로 미심쩍은 구석을 만들어, 플레이어가 무의식적으로 추리하다가 마침내 게임의 전제 자체가 뒤집히는 충격을 받게 만든다. 반전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라 게임의 구조 전체를 관통한다. 유저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스토리가 전달되는 셈이다. 훌륭한 리버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곱씹게 만든다. 반면 복선 없는 반전은 얄팍한 속임수로 전락하기 쉽다. 바이오쇼크, 33 원정대가 좋은 사례다.4. Recognition (플레이어 호명형)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모니터 밖의 플레이어 자신이 이야기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다. 단순히 캐릭터가 화면 너머를 쳐다보는 연출을 넘어, 게임이 유저의 플레이 기록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더 높은 차원의 기법이다. 세이브, 로드, 엇나간 행동 같은 게임 외적인 변수들이 게임 내부의 스토리로 끌려 들어온다. 도덕적 책임이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 본인에게 직접 꽂힐 때 이 방식은 정점을 찍는다. 깊이 몰입하게 되지만, 어설프게 쓰면 제작자가 유저를 가르치려 든다는 거부감만 크게 남는다. 언더테일, 스탠리 패러블, 니어 오토마타가 대표적이다.5. Atmospheric (세계관 및 분위기 보조형)
게임 플레이가 주는 감정선이 세계관에 크게 의존하는 방식이다. 스토리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유저가 느끼는 감정에 맥락을 부여하는 탄탄한 지지대 역할을 한다. 게임 속에서 존재하고, 사냥하고, 생존하는 행위 자체가 스토리가 된다.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스토리를 다 뺐을 때 게임의 기본적인 재미는 남아도 특유의 분위기나 감정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이 유형이다. 잘 된 애트머스페릭은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계 난이도가 높다. 림보, 몬스터 헌터가 여기에 속한다.6. Fragmented (환경적 파편화 서사형)
곳곳에 흩어진 단서를 모아 세계관을 추리하는 과정 자체가 게임의 핵심 재미로 설계된 방식이다. 탐사하고 텍스트를 읽는 행위를 통해 스토리를 조립해 나간다. 애트머스페릭과의 차이는 명확하다. 세계관을 몰라도 게임이 성립하면 애트머스페릭이고, 세계관을 파헤치는 것 자체가 게임의 주축이면 프래그먼티드다. 다크 소울의 배경 스토리를 분석하는 유튜브 영상이 수없이 쏟아지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이 방식에서 세계관은 단순히 소비되는 게 아니라 유저들에 의해 연구된다. 다만 메인 스토리 없이 파편화된 텍스트만 냅다 던져놓는다면 그건 그저 게으른 설정 놀음에 불과하다. 다크 소울, 엘든 링, 리턴 오브 더 오브라 딘이 대표적이다.7. Emergent (창발적 시스템 주도형)
개발자가 짜놓은 시스템 안에서 유저가 상호작용하며, 미리 적혀 있지 않은 새로운 사건이 플레이어마다 다르게 터져 나오는 방식이다. 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곧 이야기가 된다. 플레이어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겪는 사건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위쳐 3는 같은 퀘스트를 깨도 유저마다 감상이 다른 정도지만, 림월드는 유저마다 아예 다른 사건사고를 겪게 된다. 이것이 이머전트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시스템이 엉켜 논리가 붕괴되면 스토리가 어처구니없는 코미디로 변질되기도 한다. 림월드, 드워프 포트리스가 좋은 예다.
임계점 — 모든 유형의 작동 전제
분류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가지 개념이 더 필요하다. 바로 임계점이다.게임의 그 어떤 스토리 연출도 플레이어가 캐릭터에 완전히 감정적으로 이입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이입이 터지는 순간이 바로 임계점이다. 아서 모건은 수십 시간 동안 캠프 생활을 하고 말을 돌보면서 서서히 유저와 동화된다. 게롤트는 내 손으로 직접 내린 선택들이 겹겹이 쌓여야 비로소 나의 게롤트가 된다. 반면 저니 같은 게임은 단 한 시간 만에 그 몰입을 이끌어낸다.
진입 장벽이 낮아 임계점이 빨리 온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게임은 아니다. 근거 있는 탄탄한 빌드업 끝에 늦게 터지는 임계점일수록 그만큼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준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진입 장벽은 결함이 아니라 치밀한 설계의 결과물이다. 다만 그 설계가 유저를 설득하지 못하면, 임계점에 닿기도 전에 유저가 떨어져 나가고 아무리 훌륭한 서사 방식도 쓸모가 없어진다.
일곱 가지는 독립적이지만 배타적이지 않다
이 일곱 유형은 각각 독립된 개념이지만 동시에 여러 개가 쓰일 수 있다. 실제로 거의 모든 게임이 여러 유형을 조합하며, 유저에게 남는 경험의 성패는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갈린다. 각 요소가 플레이 과정에서 서로 어떻게 맞물려 작용하는가.어떤 요소들은 완벽한 시너지를 내지만, 어떤 요소들은 서로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때로는 한쪽의 몰입감을 깊게 만들기 위해 다른 쪽을 과감하게 덜어낸 흔적이 플레이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걸작이라 부르며 열광하는 게임들은, 이 복합적인 작용들이 덜컹거림 없이 절묘한 균형을 이뤄내며 유저에게 하나의 거대한 경험으로 다가올 때 완성된다.
데스 스트랜딩은 분위기 조성, 반전, 시스템 창발, 컷신 연출이 배달이라는 단 하나의 행위로 뭉친다. 험준한 지형과의 사투, 다른 유저들과 흔적을 공유하는 과정이 배달이라는 플레이에 완벽하게 녹아든다. 그리고 후반부에 자신이 행한 선의의 배달이 사실은 멸종을 앞당기는 방아쇠였다는 폭로가 누적된 플레이 경험 위에서 강렬하게 터진다. 유저의 선의가 공범으로 전락하는 그 순간, 거대한 반전은 게임 내내 쌓아온 묵직한 분위기 위에서 제대로 작동한다. 겉보기에 지루한 택배 게임으로 오해받곤 하는 이 게임의 진짜 가치가 여기에 있다.
위쳐 3는 플레이어의 선택(에이전시)이 중심축이며, 사냥이나 탐험 같은 모든 게임 플레이가 이 선택에 무게를 싣는 방향으로 짜여 있다. 의뢰를 해결하는 것조차 시리를 찾기 위한 과정으로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묶여 있어 겉도는 느낌이 없다.
화려한 연출(시네마틱)과 묵직한 분위기(애트머스페릭)는 가장 흔하게 쓰이는 기본기다. 워낙 공식이 잘 잡혀 있어서 많은 게임이 이 두 가지를 깔고 들어간다. 하지만 이 둘만으로는 유저의 기억에 남는 명작이 되기 힘들다. 시네마틱의 대표인 갓 오브 워나 라스트 오브 어스도 화려한 연출 아래 다른 전달 방식이 유기적으로 작동하기에 기억에 남는 것이다.
스토리 없는 게임도 훌륭한 게임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스토리가 없다고 해서 결코 나쁜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테트리스는 스토리가 거의 없어도 수백 시간을 거뜬히 몰입하게 만든다. 순수하게 게임 플레이 자체의 재미만으로 극한을 찍은 게임도 널렸고, 스토리가 게임의 필수 요소인 것도 절대 아니다. 이 분류법은 어디까지나 서사 전달 방식을 갖춘 게임에만 쓰이는 도구일 뿐, 게임의 급을 나누는 잣대가 아니다.
이 분류 자체에 대한 솔직한 입장
이 기준은 철저히 게임을 즐기는 유저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개발자들이 이런 걸 의식하고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훈수 두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미 나온 게임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방식을 거쳐 우리에게 스토리를 전달했는지 사후적으로 관찰한 결과물에 가깝다. 생소한 요소들이 조합될 때 신선한 경험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한 게이머의 정리 노트다.세상의 모든 게임을 이 일곱 칸에 완벽하게 쑤셔 넣을 수는 없다. 어떤 게임은 애매하게 걸쳐 있을 것이고, 어떤 게임은 이 기준으로 설명이 안 될 수도 있다. 원래 말이나 글이 실제 현상을 완벽히 담아내기는 힘든 법이다.
지도가 없다고 땅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지도를 펴놓고 보면 이 동네와 저 동네가 어떻게 다른지 한눈에 비교할 수 있다. 이 글이 하려는 역할도 딱 그 정도다.
마치며
그러고 보니 서두에 던진 질문을 수습해야겠다. 스텔라 블레이드의 스토리는 왜 겉돌았을까? 이 지도를 펴놓고 보면, 화려한 연출과 매력적인 세계관을 갖췄음에도, 정작 유저가 캐릭터에 완전히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임계점에 닿기 위한 서사적 빌드업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각 요소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겉돈 셈이다.최근 나의 고민을 촉발한 것이 스텔라 블레이드의 아쉬움이었다면, 사실 이 지도를 처음 그리게 만든 근본적인 원동력은 데스 스트랜딩 1 이었다. 이 게임의 서사 전달 방식은 지극히 생소한 조합이었고, 몰입이 터지는 임계점 또한 높았다. 그 높은 산을 넘지 못한 이들에겐, 또는 배달의 마찰 끝에 얻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 이들에겐 그저 지루한 택배 게임 으로 오해받고 평가절하되곤 했다. 하지만 낯선 조합이 만들어낸 험난한 과정을 기어코 뚫고 임계점에 도달한 플레이어들이 느꼈을 그 압도적인 감정의 파도는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때로는 서사 전달 방식의 낯선 조합 때문에, 혹은 임계점의 높낮이나 도달 방식이 내가 기대했던 문법과 다르다는 이유로 훌륭한 게임이 오해를 받곤 한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굳이 분석하며 즐길 필요는 없지만,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면 그만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진다. 이 일곱 가지 분류가, 낯선 길을 걷게 될 때 그 게임만의 고유한 재미를 놓치지 않게 돕는 작은 단서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