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IOHAZARD RE:3
분량의 적음이 나쁜 게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이오하자드 RE:3 리뷰 — 일찍 끝나버린 질주
바이오하자드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예측 가능함이다. 여기가 길이겠구나, 이 다음은 이렇겠구나, 얘가 보스구나. 이 예측 가능성이 단점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시리즈를 통해 플레이어는 세계의 규칙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 안에서 움직이는 경험 자체가 이 장르의 고유한 감각이 된다. 그리고 시리즈가 가면서 변주가 더해지고, 같은 공포임에도 매번 다른 느낌을 부여한다.
RE3는 그 변주가 소심했던 작품이다. 공포에서 액션 쪽으로 방향을 틀긴 했지만 진폭이 작았다. RE2처럼 밀도로 승부하지도 않았고, RE4처럼 액션으로 완전히 밀며 분량을 늘리지도 않았다. 그 어정쩡한 위치에서 6-7시간이라는 분량이 나온다. RE3가 욕을 많이 먹은 이유는 분량이지만, 분량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원인은 변주의 폭이었다.
애매한 분량
RE3가 비판받는 가장 큰 원인은 '분량'이다. 6~7시간 남짓한 플레이타임에 비해 68,400원이라는 초기 PC 발매가는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었다. 이후 49,800원으로 인하된 가격에 구매한 유저들조차 가격 대비 볼륨에 큰 불만을 가질 정도였다.다만 어째서 분량이 짧아졌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RE2의 한 인물, 즉 레온 A나 클레어 A만 플레이한 플레이타임은 RE3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맵의 볼륨 자체가 RE3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RE2의 진짜 분량은 같은 라쿤시티 경찰서를 레온과 클레어로 나눠 플레이하며, 둘이 겪은 다른 사건을 경험하게 만드는 구조에서 온다. 플레이어는 같은 공간을 두 각도로 경험하고, A와 B를 이어 플레이하면서 게임의 밀도를 두 배로 쌓아간다.
RE3는 이 구조와는 다른 방향을 지향한 게임이다. 같은 공간에서 여러 경험을 주는 RE2의 밀도 있는 설계 대신, 밖으로 나가 돌파하는 플레이를 택했다. 시내에서 지하로, 지하에서 경찰서로,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이어지는 일방향의 진행이다. 이 방향에서 A/B 시나리오는 자연스럽게 빠진다. 한 번에 밀어붙이는 추격의 템포는 반복될 때 희석되기 때문이다. 즉 RE3의 분량 문제는 맵의 볼륨이 아니라, 돌파형 직선 구조가 RE2식 분량 확보 장치와 애초에 맞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RE3는 돌파의 방향을 선택하고도 그 방향으로 충분히 멀리 가지 않았다. 시내, 지하, 경찰서, 병원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규모 자체는 RE2보다 작지 않다. 그러나 각 공간에서 돌파자로 머무는 시간이 짧다. RE3는 넓은 공간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한 공간에서 경험이 충분히 쌓이기 전에 넘어간다. 돌파의 규모가 작다는 건 맵의 크기 문제가 아니다. 맵 안에서 돌파의 경험이 충분히 만들어지기 전에 끝나버리는, 경험 밀도의 문제다.
그렇다면 RE3가 실제로 어떤 돌파의 경험을 준 것인가는, 플레이 자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경쾌해진 플레이
RE3는 RE2와 같은 엔진, 같은 라쿤시티, 비슷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플레이 감각이 다르다. RE2가 어두운 복도에서 한 발 한 발 아껴 쏘는 게임이었다면, RE3는 훨씬 경쾌하다. 질이 집에서 나와 좀비가 가득한 시내를 뚫고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기차를 가동시키기 위해 돌아다니고, 병원에서는 밀려오는 좀비 웨이브를 막아내고, 네메시스와의 보스전에서는 로켓런처를 집어 든다. RE2가 거의 100퍼센트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조용한 게임이었다면, RE3는 밖으로 나가 환경을 돌파하는 게임이다.자원 구성도 RE2보다 넉넉하다. 탄약 한 발의 무게가 공포의 뼈대였던 RE2와 달리, RE3에서는 자원이 압박의 도구로 작동하지 않는다. 즉사기로 데스 화면을 보는 경우는 있지만, 계속 트라이해야 하는 스트레스성 데스가 아니다. 한 번 죽으면 조심하면 되는 정도의 난이도다. RE2에서 공포의 심리적 압박이 체감 난이도를 올리는 장치였다면, RE3에서는 그 장치가 느슨해져 있다.
주인공을 보자면, 질 발렌타인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시원시원하다. 클레어가 외유내강의 인물이라면, 질은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기 어려운 badass의 감각을 가진 캐릭터다. S.T.A.R.S. 출신으로 이미 생지옥을 한 번 겪고 나온 특수부대원이 다시 총을 잡는 이야기이기에, 플레이 톤 자체가 생존자가 아니라 반격자에 가깝다. 짧은 머리에 과하지 않은 복장, 그럼에도 화면 안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캐릭터 디자인이 이 감각을 뒷받침한다. 캐릭터 디자인도 게임의 일부다. 처음부터 군인인 카를로스의 존재도 레온·클레어와는 다른 톤을 만든다. 다만 카를로스는 질을 살리기 위해 움직이는 인상적인 조력자이면서도 정작 큰 싸움에서는 자리를 비운다는 점이 아쉬웠다. 물론 이는 게임적 연출을 위한 장치 정도로 봐도 되겠다.
플레이의 경쾌함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시내 오프닝과 병원 웨이브, 그리고 후반의 반격 구간들이다. 오프닝에서 질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불길과 좀비가 뒤섞인 거리를 달리는 장면은 RE3의 톤을 한 번에 정립한다. 이 캐릭터가 어떤 게임을 끌고 갈 것인지를 초반부에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병원에서 카를로스로 밀려오는 좀비 웨이브를 막아내는 구간은 부대원의 시점을 빌려 방어전의 쾌감을 제공하고, 후반의 거대한 보스를 향한 레일건은 RE2에서 탄약 한 발을 아끼며 쌓아온 긴장을 한꺼번에 풀어주는 반격의 쾌감을 준다. 도망치던 플레이어가 맞받아치는 순간, RE3가 지향한 경쾌함의 방향이 정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들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시계탑의 네메시스 보스전처럼 자원 관리와 회피 타이밍이 동시에 요구되는 구간에서는 난이도가 확 올라가지만, 그런 도전의 순간조차 금방 끝난다. 돌파의 쾌감도, 도전의 긴장도 충분히 숙성될 시간이 없다. 플레이 감각 자체는 분명히 매력적인데, 그 매력이 축적되기 전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RE3가 지향한 경쾌함은 방향이 틀린 적이 없다. 다만 그 경쾌함이 플레이어에게 기억으로 남을 만큼 반복되고 쌓일 시간이 부족했다. 이 부족함은 네메시스와도 관련이 있다.
새로운 추격자
네메시스는 RE2의 타이런트를 계승하는 새로운 추격자다. 전작의 타이런트가 옷을 잘 갖춰 입고 모자까지 쓴 정돈된 추격자였다면, 네메시스는 초반부터 미완성되고 프로토타입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야외 진행 분위기와 맞물려, 추격자를 더 과격하고 날것의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추격의 공간도 다르다. 타이런트는 밀폐된 경찰서 내부에서 쫓아왔기에, 좁은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압박감이 핵심이었다. 네메시스는 시내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쫓아오기에, 좁은 압박보다는 광역 추격의 감각이 앞선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네메시스의 전체적인 인상은 타이런트만큼 강하지 않다. 타이런트가 등장부터 퇴장까지 일관된 무게감으로 플레이어를 짓누르는 반면, 네메시스는 초반에는 다소 평범하게 느껴지다가 후반부 거대화 이후에야 본격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네메시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분량이 추격자와 플레이어 사이의 긴장 관계를 충분히 숙성시키기에 짧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타이런트는 경찰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플레이어와 오래 공존하며 압박을 쌓아간 반면, 네메시스는 그럴 시간 자체가 부족하다. 네메시스가 RE3만의 긴장을 쌓지 못한다면, 이 게임이 기대는 것은 RE2가 남긴 기억이다.
RE2의 연장선
RE3에서 가장 반가운 순간은 경찰서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RE2에서 수없이 돌아다녔던 그 경찰서가 그대로 등장한다. 금고 비밀번호까지 RE2와 동일하다. RE2에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켄도 부녀도 RE3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 반가움은 RE3가 단독으로는 줄 수 없는, 시리즈를 이어서 플레이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경험이다.카를로스로 경찰서를 플레이하는 구간에서는 공간의 성격이 뒤집힌다. RE2에서 공포의 공간이었던 경찰서가, 부대원 카를로스의 손에서는 쓸어버리는 공간으로 바뀐다. 같은 맵인데 캐릭터가 바뀌니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 구간이 속 시원한 이유는 카를로스의 화력이 강해서도 있지만, RE2에서 좀비 하나에 탄약을 아끼며 조심조심 움직였던 기억이 플레이어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긴장이 있었기에 똑같은 복도를 총탄을 아끼지 않고 돌파하는 감각이 단순한 액션 이상의 쾌감이 된다. RE2의 공포를 경험한 플레이어에게만 성립하는 해방감이다.
RE2 리뷰에서 타이런트 등장 이후 경찰서가 쫓기는 공간으로 변이한다고 썼는데, 카를로스 파트는 그 변주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같은 공간이 캐릭터와 무기 구성에 따라 성격 자체를 바꾼다. 바이오하자드가 공간을 다루는 방식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RE3의 변주가 가장 성공한 구간이기도 하다. 다만 이 성공조차 짧게 끝난다. RE3가 RE2에 기대어 자기 몫을 해낸다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의 정확한 위치다.
거쳐가는 시리즈로서의 가치
바이오하자드는 파이널판타지처럼 각 작품이 독립된 세계관을 가진 시리즈가 아니다. 하나의 사건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인물들을 통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며 이어지는 유기적 구조다. 이 흐름 안에서 RE3는 지나가는 구간이고, 매주 기다려야 했던 드라마가 이미 다음 화까지 공개된 지금, RE3 당시의 짧은 분량은 그때만큼 큰 단점이 아니다.시리즈를 따라가는 플레이어에게 RE3의 분량은 더 이상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라, 다음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짧은 분량 안에서도 RE3의 분위기 자체는 매력적이다. 경쾌해진 플레이, 시내 돌파의 감각, 카를로스 파트의 시원함, 그리고 무엇보다 질 발렌타인이라는 캐릭터. 필자 같이 원작을 경험하지 않은 같은 리메이크 세대 플레이어에게 질을 만날 수 있는 게임은 RE엔진 라인업에서 이것이 유일하다. 바이오하자드의 주요 인물 중 하나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라는 것만으로도, 이 게임은 시리즈의 여정에서 비워둘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다.
RE3는 변주가 소심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변주의 방향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방향으로 충분히 멀리 가지 못한 것이다. 돌파의 규모가 조금 더 컸다면, 각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RE3는 지금과는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이 아쉬움은 RE3가 더 좋은 게임이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지, 안 좋은 게임이라는 평가가 아니다. 리메이크 세대가 바이오하자드라는 시리즈를 경험하는 여정 안에서, RE3는 그 자리에 놓여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